인간이 발전시켜 온 다른 문명에 비해 인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대량 인쇄의 시대를 열었던 기계식 인쇄기는 15세기 중반에야 발명되었습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의 인쇄기 발명을 중심으로 인쇄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구텐베르크 이전의 인쇄
인쇄(印刷, Printing)는 프레스기를 이용하여 잉크로 종이에 글과 그림을 찍어내는 과정입니다. 인쇄는 목판 인쇄에서 출발했는데 나무로 깎은 판을 이용해서 한 장의 종이를 인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석가탑을 만든 751년 이전에 목판으로 인쇄되었습니다. 8세기경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목판을 이용해서 종이에 문자들을 인쇄했습니다. 1045년경 중국에서는 인쇄업자인 필승(畢昇)이 진흙을 구워서 이동 가능하고 재사용할 수 있는 문자의 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15세기 초 조선에서는 10만 개 이상의 동판 문자 틀을 가진 활판인쇄술도 개발됐습니다.
14세기 유럽에서도 목판 인쇄술로 성경을 만들었지만 작은 글씨를 목판으로 깎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습니다. 책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면서 목판 인쇄와 수작업으로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15세기 인쇄기 발명 이전에 책이나 논문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손으로 베끼는 것이었다. 중세에는 수도사들이 필사실에서 수많은 필사본을 만들어냈습니다. 손으로 일일이 베껴 써서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에 책은 귀하고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개발되기 전에 유럽에서는 수천 권의 필사본들이 출판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을 일으키다
1440년대 독일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금속활자를 활용한 인쇄 방식으로 최초의 근대적인 인쇄기를 개발했습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속도와 효율성이 뛰어난 인쇄기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혁신 기술은 크게 세 가지인데 1) 많은 활자를 정확히 주조할 수 있도록 자모(字母)들이 각인된 주형과 활자 합금을 사용했고 2) 포도주 제조나 제지에 쓰이는 프레스의 압착 기능을 응용해서 만들었으며 3) 중국, 한국, 유럽의 목판인쇄기술에서 볼 수 없었던 유성 인쇄잉크를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획기적인 기술로 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 졌고 훨씬 쉽게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성경 66권 필사본 한 질을 사려면 집 10채 값을 내야 했지만 인쇄기술을 통한 성경 대량보급으로 사람들이 손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455년경 42행 성경으로도 알려진 그 유명한 구텐베르크 성경(Gutenberg Bible)의 인쇄본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걸작은 서구에서 활자를 사용하여 인쇄된 최초의 주요 서적이었습니다.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쿠텐베르크가 근대 활판 인쇄술의 발명자는 아닙니다. 목판 인쇄는 중국에서 3세기부터 사용되고 있었고 금속활자도 고려시대에 개발되어 경전 인쇄에 사용되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진정한 업적은 불편하고 번거로웠던 인쇄술을 기계식으로 대체하여 대량 인쇄가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구텐베르크가 불러온 대량인쇄 혁명으로 16세기 초 900만 권 이상이 인쇄되었다고 합니다.
구텐베르크, 유럽을 바꾸다
구텐베르크 인쇄기의 기술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베니스, 파리, 런던과 같은 도시에 인쇄기가 설치되어 종교, 과학, 문학에 이르기까지 인쇄물이 넘쳐나게 됐습니다. 대량 인쇄의 발달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계몽주의의 빛을 밝혔으며 과학 혁명의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구텐베르크가 태어난 마인츠는 구텐베르크 인쇄기가 발명된 곳으로 인쇄의 중심지였고 1464년에는 쾰른이 인쇄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남부에서는 바젤,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등 교역 중심도시들이 새로운 인쇄 중심지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뉘른베르크의 안톤 코베르거(Anton Koberger)는 24대의 인쇄기로 바젤, 스트라스부르크, 리옹, 파리 등에 지사를 두고 출판을 했던 세계 최초의 국제 출판업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대량 인쇄가 르네상스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1462년경 로마 근교 베네딕토회(Benedictine Order)의 수도원을 통해 이탈리아에 전해져서 거대한 상업 도시를 중심으로 인쇄와 출판이 발달하게 됩니다. 1500년경 베네치아에는 인쇄기가 150대나 있었으며, 니콜라스 젠슨(Nicolas Jenson)과 알도 마누치오(Paolo Manuzio)라는 인쇄업자가 서적 출판을 활발히 했다고 전해집니다. 젠슨은 1470년 로마체(Roman type) 활자를 완성시킨 사람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1470년 파리 소르본대학 내에 인쇄기를 설치하여 인쇄가 시작됐습니다. 파리에서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인쇄를 주도했고 리옹에서는 인문주의와 신교에 관련된 책들이 출판되었습니다. 독일의 인쇄술은 다른 유럽국가들에 빠르게 전파되어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1470), 헝가리의 부다페스트(1473), 폴란드의 크라쿠프(1474), 스페인의 발렌시아(1473) 등의 도시들이 인쇄 중심지로 성장합니다. 영국은 1476년 윌리엄 캑스턴(William Caxton)에 의해 인쇄 기술이 도입됩니다. 쾰른에서 인쇄술을 배운 그는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서적을 출판하여 영어가 공식적인 언어가 되는데 기여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로 대량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읽고 쓰고 지식을 쌓는 것이 더 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습니다. 인쇄의 역사가 곧 지식 혁명의 역사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