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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꿈으로 두려움을 이겨낸 비행기의 역사

by 지식웰니스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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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중 난기류로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린 경험이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안전하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 두려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비행기의 발명과정에는 안전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미지의 상황에서 날고 싶다는 꿈으로 엄청난 두려움을 이겨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꿈으로 두려움을 이겨낸 비행의 역사는 말 그대로 가슴 뛰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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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형제 이전 비행의 역사

비행기(飛行機, Plane, Airplane)는 평평한 날개 (Plane)가 달린 고정익기를 의미합니다. 항공기(Aircraft)는 비행기 같은 고정익기 뿐만 아니라 헬리콥터 같은 회전익기, 글라이더까지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새 같은 날개, 딱딱한 망토 등을 몸에 묶고 탑에서 뛰어내리는 타워 점프로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Icarus) 이야기는 하늘을 날고자 하는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이카루스는 날개를 만들어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으나 날개의 촛농이 녹아내려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타워 점프와 함께 연도 고대의 비행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 중국에서 묵자가 발명했다고 하는 연은 인간이 만든 비행의 초기 사례로 여겨지며 서서히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조지프 니덤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 중국에서 천등이라는 작은 열기구를 만들어서 전통 축제 때 띄웠다고 합니다. 9세기 스페인의 과학자 압바스 이븐 피르나스(Abbas ibn Firnas)는 독수리 깃털로 몸을 덮고 팔에 날개를 붙인 채 코르도바에서 점프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16세기 초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새가 자기 무게를 받쳐줄 수 있는 공기 밀도 층 위에서는 뜨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박쥐 날개를 본따서 오너솝터를 설계했습니다. 그는 오너솝터의 날개를 퍼덕여 인간의 무게를 받쳐주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1647년 이탈리아 발명가 티토 리비오 부라티니(Tito Livio Burattini)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4개의 고정된 글라이더 날개가 있는 모형 항공기를 제작했는데 비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태운 여행 - 기구

1783년 프랑스의 몽골피에(Montgolfier)형제가 열팽창한 공기를 주입한 열기구(Hot Air Balloon)를 발명하여 파리에서 30만 군중 앞에서 10km를 비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 성공 10일 뒤 프랑스 물리학자 샤를(Charles)은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로 만든 수소(水素) 기구로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조셉과 쟈크는 종이와 베로 열기구를 만들었고 물리학자 드 로제 (Rozier, F. de)와 아를란드 후작이 이 열기구로 500m 높이로 9km를 25분 정도 비행했습니다. 이후 샤를의 수소 기구가 도버해협 횡단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몽골피에 형제는 도버해협 횡단을 위해 수소기구와 열기구를 합한 복합형 기구를 만듭니다. 최초의 유인 비행에 성공했던 드 로제 등 두 사람이 탑승했는데 기구 폭발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1811년 독일의 알브레히트 베르블링거 (Albrecht Berblinger)는 나는 기계를 제작하여 울름에서 다뉴브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19세기판 타워 점프였습니다.

비행선과 글라이더

기구는 독자적인 엔진이 없어서 자유로운 조종이 어려웠고 엔진이 달린 비행선(Airship)이 등장하게 됩니다. 수소처럼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를 넣은 비행선이 먼저 제작되었고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체에 대한 발명도 이어져 높은 언덕에서 활공하는 글라이더가 제작되었습니다. 활공비행에 대한 관심으로 비행기의 기본 구조와 공기 역학에 관련된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1799년 항공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조지 케일리(George Caley)는 현대 항공기의 개념을 양력, 추진, 제어를 위한 별도의 시스템이 있는 고정익기로 규정했습니다.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기에 영향을 주는 무게, 양력, 항력, 추력 등 4가지 힘을 발견했고 적절한 추진력과 양력을 제공하기 위해 경량 엔진이 개발될 때까지는 지속적 비행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새의 모형을 본떠서 글라이더를 만들었는데 오늘날 비행기의 근본이라 할 만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1852년 프랑스의 앙리 지파드(Henri Giffard)가 증기기관 엔진을 장착한 비행선의 원형으로 24km를 비행해서 최초의 동력비행에 성공했습니다. 1879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비오(Biot)는 새 모양의 글라이더를 만들고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영국의 호라티오 필립스(Horatio Phillips)는 날개 부분에 대한 풍동 연구로 공기역학적 양력의 원리를 증명했습니다. 1883년부터 미국의 존 조셉 몽고메리(John Joseph Montgomery)는 세 대의 유인 글라이더 시리즈를 개발했습니다. 1890년 프랑스의 아델(Clément Ader)은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비행기계인 에올(Éole)로 비행에 성공했는데 공기보다 무거운 동력비행에 해당하는 것으로 1897년 성능이 개선된 아비온(Avion)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1891년 비행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Lilienthal)은 자신이 제작한 글라이더로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1896년 자신이 만든 글라이더의 시험비행 도중 추락사하고 말았습니다. 1900년 독일의 체펠린(Ferdinand von Zeppelin)이 가솔린 엔진과 알루미늄 프로펠러를 장착한 대형 비행선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비행선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는데는 1901년 바람을 거슬러 이동하는 최초의 비행선을 선보였고 여행은 물론 폭탄 수송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체펠린의 비행선은 비행선의 대명사가 되었고 1930년대까지 장거리 비행을 지배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

흔히 라이트 형제라 불리는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와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는 시험비행 중 추락사한 릴리엔탈에 감동을 받고 비행기에 도전하게 됐다고 합니다.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은 아델의 비행처럼 공기보다 무거운 동력비행이었는데 아델은 증기기관을, 라이트 형제는 가솔린기관을 사용했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은 유인비행, 동력비행,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체이면서 지속적인 비행 조정까지 성공하면서 오늘날의 비행과 동등한 수준으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1879년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받은 장난감 비행기를 가지고 놀면서 하늘을 나는 꿈을 키웠습니다. 1899년 스미소니언 협회에서 보내온 비행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기체 구조나 엔진보다 조종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독학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고 릴리엔탈의 [항공의 기초로서의 새의 비행] 등 비행 관련 문헌을 집중적으로 탐구했습니다. 1900년 본격적인 비행실험을 위해 쌍날개 글라이더를 제작하여 실험을 했는데, 1호기의 비행거리는 30m밖에 되지 않았고, 2호기도 180m에 불과했다. 3년의 연구 끝에 12마력의 가벼운 엔진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1901년 풍동(風洞, Wind Tunnel)을 만들었는데 풍동은 비행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발명품입니다. 풍동을 통해 날개가 받는 양력(Lift Force)과 항력(Drag Force)을 계산할 수 있었고, 길고 좁은 날개가 효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도H 알아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든 3호기는 대성공이었습니다. 1903년 오빌이 탄 라이트 플라이어(Wright Flyer) 1호가 하늘을 날았습니다. 비행시간은 12초, 날아간 거리는 36.5m, 참관인은 5명이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꿈이 이뤄진 기적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오빌에 이어 형 윌버도 59초 동안 260m를 비행했습니다. 1904년 만든 플라이어 2호는 상체를 일으켜 조종할 수 있도록 했고 바퀴를 달아 어디에서나 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905년 만든 플라이어 3호는 날개 비틀기를 방향키와 분리하여 따로 작동하도록 설계됐고 선회 비행과 8자 비행도 성공시킨 기종입니다. 1908년 워싱턴 외곽 포트 마이어에서 1천 명의 구경꾼들 앞에서 라이트 형제는 국방부와 계약한 모델 A 시범비행이 있었습니다. 1909년 라이트 회사(Wright Company)를 설립하고 모델 B를 선보였습니다. 1910년 모델 B는 최초로 상업적인 항공화물 운송에 성공했고 라이트 회사의 비행기 제조공장은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 설립되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최대 경쟁자인 랭글리는 모형 비행기를 제작한 후 그대로 확장하여 실물 비행기로 만드는 방식을 썼는데 계속 시험비행에 실패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모형 비행기가 아니라 실물의 글라이더에서 출발해서 성공 확율을 높였습니다. 1908년 커티스(Glenn H. Curtiss)가 비행 실험에 성공하자 라이트 형제는 특허료를 지불할 것을 요청했지만 커티스는 거부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커티스에 대해 특허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고 기나긴 1917년 미국 정부의 중재로 상호 특허사용 협정이 체결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1909년 영국해협 횡단 비행이 성공하였는데, 이로써 비행기는 많은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트 형제 이후의 비행

1914년까지 민간, 스포츠, 군사용으로 실용적인 비행기와 비행선이 개발됐습니다. 비행기는 발명되자마자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는데 이탈리아는 이탈리아-터키 전쟁 (1911년~1912년) 동안 리비아에서 정찰, 폭격 및 포병 교정 비행을 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 후 10년이 조금 지나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전쟁 초에는 비행기가 주로 정찰기로 사용되었지만 점차 전투기나 폭격기처럼 크고 비행 속도나 고도도 높은 비행기들이 등장합니다. 공격, 방어 및 정찰에 비행선과 함께 비행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됐습니다. 비행기들의 공중전이 펼쳐졌고 다양한 실용 항공기의 개발시대가 막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프로펠러와 동력장치를 앞에 달고 꼬리날개를 뒤에 다는 비행기가 보편화되었고 1927년 린드버그(Charles A. Lindbergh)가 대서양 횡단 무착륙 비행에 성공함으로써 비행에 대한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뉴욕-파리를 33시간 30분에 비행하여 25,000$의 현상금을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1939년 제트추진 항공기가 등장하여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비행선은 비행기로 대체되었으며 제트 엔진은 민간과 군용 항공 모두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제트 엔진은 장거리 공중운송수단에 로켓 엔진은 미사일이나 인공위성의 발사체로 사용되었습니다. 1957년 제트추진 여객기가 등장하면서 먼 거리를 짧은 시간에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자장치를 이용한 항법이 개발되어 비행의 안전성이 높아지고 본격적인 항공여행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우주 시대를 열었는데 강력한 로켓 개발로 지구 중력권 밖인 우주로 물체를 보내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1957년 소련에서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하고 1961년 유인 우주비행과 1968년 달 여행도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1967년 우주 공간에서 두 우주선이 결합하는 도킹(docking)이 성공했고 우주 정거장 설치와 우주왕복선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인공위성은 군사, 통신, 지구 관측, 기후, 우주 관측 등의 목적에 이용되고 있고 여러 행성으로 우주 탐사선을 보내 과학적 자료를 얻고 있습니다. 21세기에는 군사, 민간 및 레저 용도로 무인 드론이 대규모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비행기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정평구(鄭平九)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비거(飛車)를 사용해 외부와 연락을 하고 성에 갇혀 있던 성주를 30리 밖으로 탈출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거의 형태나 구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서 비거가 실존했는지 논란을 낳고 있습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은 처음에는 망상이나 몽상으로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용기는 마침내 꿈을 현실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발명한 수많은 발명품 중에서도 비행기는 가장 극적이고 믿기 힘든 발명품인 것 같습니다.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은 땅과 바다에 머물렀던 인간의 활동영역을 하늘로 넓혔고 나아가 우주까지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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