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불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러한 오랜 불의 역사가 우리 고유의 문화를 만나면서 온돌, 봉수, 화약, 연등회 같은 다양한 불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불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보겠습니다.
불의 역사 -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선사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충격법이나 마찰법으로 불을 만들었습니다. 충격법은 부싯돌(차돌)을 황철광으로 쳐서 불꽃을 만들고, 그 불꽃이 마른 쑥 같이 불붙기 쉬운 것에 옮겨 붙게 하는 방법입니다. 마찰법은 구멍 뚫린 나무판을 고정시키고 나무막대를 수직으로 구멍 속에 넣어 마찰열로 불을 붙이는 방식입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화덕에 불을 지펴서 난방을 하고 짐승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신석기에는 원시무문토기나 즐문토기가 발전했고 토기는 원시인들이 불을 이용하면서 얻게 된 커다란 문명의 이기였습니다. 오목거울로 햇빛을 모아 불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2세기부터 오목거울이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고, 이 오목거울은 양수(陽燧) 또는 금수(金燧)라고 알려졌습니다. 볼록렌즈는 신라시대 혹은 그전부터 화주(火珠)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가정에서는 화로의 불씨를 대대로 꺼뜨리지 않고 지키는 것을 중시했는데 불씨를 지키는 일은 안주인의 가장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반면 조선시대 병조에서는 매년 다섯 차례 새 불을 만들어 썼다고도 합니다. 한식에 내병조(內兵曹)에서 새로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은 그 불씨를 각 관청과 대신들에게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불의 역사 - 근대 이후
1885년 서울의 양화도(楊花渡)에 영국인이 성냥공장을 세우면서 성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석탄과 석유도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전기도 제2의 불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전등은 1884년 궁궐에 설치된 바가 있습니다. 1898년 조선 황실과 미국인들이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서울 진고개에 전등을 달았습니다. 제3의 불이라는 원자력은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1978년부터 상업 운전을 시작했습니다. 전기가 빛을 내는 불을 완전히 대체한 것과 달리, 열을 내는 불은 전기보다는 석탄, 가스 등 다른 에너지가 널리 이용되었습니다. 나무는 석탄으로 대체되었고 다시 가스로 대체되었습니다. 가스는 1909년 처음 이용된 바가 있는데 민간용 도시가스는 1972년 시작됐습니다. 우리나라에 석유가 들어온 것은 1880년대 미국의 스탠더드 석유 제품을 수입한 것이 최초입니다.
불의 문화 - 온돌
온돌은 우리나라에서 기원전부터 발달하여 지금까지 남아있는 독특한 난방방식입니다. 함경북도 웅기의 석기시대 유적에 온돌의 원시형태가 남아있고, 중국 문헌에 삼국시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서 방을 데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만주와 몽고에도 온돌과 비슷한 형태가 있는데 온돌은 선사시대부터 동북아시아의 민족 중 부여족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서로 다른 형태로 진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온돌은 방고래 위에 납작한 돌로 구들장을 만들고 진흙을 바른 뒤 장판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아궁이 불의 열과 연기가 방고래를 따라 굴뚝으로 빠져 나가면서 방고래를 가열하여 방바닥을 데우는 난방방식입니다. 온돌은 방바닥은 뜨거운데 윗부분이 외풍이 심한 단점이 있고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화로가 발달했습니다. 서민들은 질화로나 무쇠화로를, 부자들은 돌화로나 놋쇠화로를 널리 사용했습니다. 화로는 음식을 데우기도 하고, 담뱃불을 붙이거나 인두를 달구는 데에도 사용했습니다. 대부분의 아파트는 지금도 온돌방식을 선택하고 있는데 온돌 밑으로 불과 연기 대신 가열된 물이 통과하는 것이 달라진 점입니다.
불의 문화 - 봉수
봉수(烽燧) 혹은 봉화는 근대 이전에 가장 빠르고 정확한 통신수단이었습니다. 삼국시대에도 봉수제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만 본격적인 봉수제도가 정착한 것은 고려 의종 3년인 1149년부터라고 합니다. 십리 정도마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봉화터를 만들고 봉수꾼을 상주시켰습니다. 조선 세종 때 기록에 따르면 전국의 봉수대는 673개였고, 횃불을 1개에서 5개까지 구분하여 적에 대한 정보를 서울로 알렸습니다. 평상시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접근하면 3개, 국경을 넘으면 4개, 싸움이 벌어지면 5개를 올리도록 했습니다. 국경 어디라도 12시간 정도면 서울의 본부인 목멱산, 즉 남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불의 문화 - 화약
화공법은 화약의 발명으로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화약의 발명은 중국에 이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두번째로 이루어낸 일입니다. 고려말 최무선(崔茂宣)은 각고의 노력 끝에 염초, 황, 숯가루를 섞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우왕 3년인 1377년 화통도감(火㷁都監)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화약이 제조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소량의 화약을 사서 왜구와의 전투에 이용했던 고려는 화약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최무선의 화약은 화살을 쏘거나 철환을 발사하는 장치를 발달시켰고, 화살을 연발로 쏠 수 있는 화차(火車)가 조선 태종 때에 처음 고안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불의 문화 - 연등회
불은 국가 행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연등행사는 삼국시대부터 널리 행해졌고 연등회는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의 2대 명절이었습니다. 팔관회가 서울에서만 열렸던 것과 달리 연등회는 전국에서 열렸습니다. 고려 의종 때부터 정월 보름으로 옮겨서 열렸던 연등회는 조선시대에 불탄일인 4월 초파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불꽃놀이는 고려 말 화약이 수입되면서 궁궐 행사가 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널리 행해지지 않다가 광복 후 각종 행사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문화를 수용하고 우리 것으로 소화한 장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불이 도입되고 발전한 역사에서도 기술을 우리 고유의 것으로 승화시켜온 우리 역사와 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